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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이 끝나 조금은 한가해진 때, 서점에 들러 읽을거리를 찾았다. 천천히 둘러보다 눈에 띄는 책에 저절로 손이 간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던가. 요즘 들어 부쩍 뒤적여보지 않아도 표지만으로 눈을 사로잡는 책이 늘었다. 책의 표지에 따라 분명 판매량은 달라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만족도는?

2002년 01월 03일

한국적 코드를 찾는 작가주의자



책의 표지는 독자들과 가장 먼저 만나는 책의 얼굴이다. 책의 표지에 따라 판매량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사실이다. 치열한 출판 경쟁에서 북디자이너의 역할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있다. 하지만 잘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이 아닌 것처럼, 표지가 맘에 들어 산 책 모두가 내용까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출판하는 사람들의 몇 퍼센트가 과연 떳떳한 책을 출판하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특히 우리나라처럼 책을 안 읽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면, 그리고 요즘처럼 불황의 늪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는 자신감은 더욱 줄어들게 마련이다. 표지는 더욱 화려해지고 예뻐진다. 북디자이너의 작업이 겉포장만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이라면 오히려 쉬울지도 모른다.
"책을 만드는 데 디자인의 힘은 10%예요. 90%의 완성도를 지닌 책을 100%로 만드는 게 북디자이너의 역할이죠. 좋은 책에 독자들의 눈을 머물게 하는 디자인, 작가가 글로 풀어낸 메시지를 함축해 시각화하는 게 이상적인 북디자인이죠.”
기본적으로 책 속에 담고 있는 메시지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정정호씨는 이를 ‘책의 영혼’이라 표현한다.


미술학도의 부업으로 이어져

해방 후 책의 표지는 회화 작가의 그림이 주를 이루다 80년대 후반까지는 미술학도들에게 부업으로 맡겨졌다. 정정호씨도 이런 아르바이트를 하는 미술학도 중 한사람이었다. 판화를 전공하던 그에게 책표지 작업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의 작업이 광고인을 꿈꾸던 그를 북디자이너의 길로 이끌었다.
"그때 작업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단호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봐주고 관심을 가져줄까에 대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치졸한 작가주의에 빠져 있었어요. 나만의 세계에 빠져 내 생각만으로 작업을 했죠. 책을 받는 순간 내 왜소함을 실감하고 엄청나게 울었어요.”
당시의 시행착오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91년부터 본격적으로 북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북디자이너’라는 말이 막 나오기 시작하던 무렵, 그는 그 선두대열에 뛰어든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시공사와 웅진출판사에서 근무했고, 95년부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현재에 이르렀다.
"북디자이너는 작가주의가 강한 직업이에요.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작업을 하죠. 어느 정도 내 유형이 인정된 상태에서 작업이 가능하거든요. 따라서 북디자인에는 정답이 없어요. 작가의 해석능력에 따라 표현방법도 다양하죠.”
작가주의. 정정호씨가 말하는 북디자이너의 매력이다. 철저하게 작가주의에 심취해야 하지만 순수예술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도 안 된다. ‘내 그림이 싫으면 보지 말아라’는 작가의 고집보다는 독자와의 타협이 필수적인 작가주의다. 순수예술 작가는 사람들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지만, 북디자이너는 자신의 색을 살리면서 독자층에 맞는 색을 만들어가는 작업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디자인은 ‘커뮤니케이션 아트’다.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직업인 것이다.
어떤 작업은 5분이면 만족할 만한 표지가 나올 때도 있다. 정정호씨가 가장 만족한 작업으로 꼽는 김용택 시집 <사랑>이 그런 경우다. 하지만 의욕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지만 한두달이 지나도 표지안이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또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책이 나와야 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고, 막연하게 붙들고 있을 수만도 없다. 이때는 작가나 기획자와 끊임없이 대화를 하고, 책의 이미지에 대한 이미지를 정리해 그림으로 다듬어간다.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정리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게 북디자이너의 역할이에요. 이러한 작업 속에서 난 동료들에 대한 신뢰를 키워가고, 동료들도 저에 대한 믿음을 키우죠. 난관 속에서 서로의 신뢰를 굳히고, 서로를 조직화해가는 과정에서 전 보람을 느껴요.”
정정호씨는 북디자이너가 책표지만 디자인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디지털시대이다. 변화가 빠른 만큼 한곳에 눈을 머물게 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시각화는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출판 형태가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서 책 기획자에게 필요한 것은 사진과 그림을 보는 눈이다. 함축적 내용을 명료하게 시각화할 수 있는 사람이 책을 기획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좋은 사진과 그림을 만들어낼 수는 없어도, 좋은 사진과 그림을 솎아낼 수 있는 눈을 지닌 북디자이너가 책 전체를 기획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좀더 진지하게, 책임감을 가지고 출판업계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는 미국 등의 선진국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작업이다. 최근 출간한 책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원형의 섬, 진도>라는 사진 에세이집이다. 80년대에 나왔던 <한국의 발견>과 같은 의도로 만든 책이지만, 조금은 다른 작품이다. 이 책을 위해 정 실장은 2001년 상반기를 꼬박 할애했다. 작가와 언쟁도 많았고 우여곡절도 많았던 책이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다.
<한국의 발견>은 사명감으로 우리나라를 정리한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던 학술적인 책이었다. 반면 <원형의 섬, 진도>는 작가 한사람과 사진작가 한사람이 작업한 책으로 두사람이 한국을 보는 눈,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담긴 책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문서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인 견해가 많은 책으로 독자들은 작가의 해석을 비판하고, 이에 반박하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사실을 찾아보고 공부하게 된다는 그의 설명이다.


경력 11년차, ‘아직도 초년병’

“현대 출판의 새로운 형태라고 생각해요. 좀더 철저한 작가주의에 입각한 작품으로 한시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죠. 더불어 ‘책에 적힌 것은 곧 진실이다’가 아니라 독자들과 함께 풀어가는 거죠.”
이러한 이유 외에도 정정호씨가 이 책에 유난히 애착을 보이는 또다른 이유는 그가 북디자인을 하는 데 핵심원칙으로 정해두고 있는 코드를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 한국인이에요. 표지를 기획할 때, 핏속에 용해되어 있는 느낌들, 한국적인 정서와 색감들을 찾으려 노력하죠. 그리고 또 하나의 코드인 메모리스. 추억, 회상, 기억…. PC가 최첨단화되어 가고 있지만 8비트 컴퓨터나 타자기 등에서 꾸며지지 않은 느낌을 받죠. 독자들이 책을 선택하는 데 입맛을 돋우는 것은 아날로그적이고 인간적이고, 자연친화적인 느낌의 시각화예요.”
<펠리컨 브리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공지영의 <고등어> …. 꽤 이름 있는 책들의 표지 작업을 했고, 벌써 경력 11년의 북디자이너지만 그는 자신을 아직까지도 초년병이라고 말하고는 ‘작은 꿈’이지만 출판에 대한 진지함이 짙게 깔린, 자신만의 목표를 털어놓는다.
"지금도 너무 어려워요. 하면 할수록 어렵고, 배움에 끝이 없는 직업이에요. 회귀하는 느낌, 머무르지 않고 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데도 결국 돌아보면 내 뒤예요. 중심을 두고 점점 더 멀리 돌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지향점을 바깥에 두고 점점 더 멀리 원을 그려 가는 게 제 목표예요. 또 전통 한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에 스튜디오를 마련해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작업하고 싶고, 북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배운 것들을 알려주고도 싶어요.”


●●북디자이너가 되는 길●●

북 디자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작업은 아니다. “자기의 시각에서만 멋지고 예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고 질책을 받아들이고, 작품을 개선하고 보충·개발해서 발전시킬 자세를 가진 사람이 오래할 수 있다”는 게 정정호씨의 귀띔이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북디자이너는 300여명 정도다. 계속 그 덩치가 커지고 있는 우리의 출판시장에 전문 북디자이너의 수는 절대 부족하지만, 사람이 없어 못쓰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북디자이너만을 전문으로 배출하는 대학이나 학과도 없다. 따라서 북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일반대학이나 전문대의 출판·디자인 관련 학과나 편집디자인학원과 컴퓨터그래픽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출판 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매우 적은 수지만 북디자인 전문 대행사에서 어시스턴트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는 것이 북디자이너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보통 4~5년 정도의 경력을 쌓으면 디렉터가 될 수 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전문 대행사에서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일찍부터 북디자인의 현장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
"포트폴리오를 들고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출판사는 사람의 얘기를 다루는 곳입니다. 생각보다 문턱이 높지 않아요. 정말 하고 싶다면 일단 찾아가 일할 기회를 얻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움직이는 동영상보다 한장의 사진이나 그림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진실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전해볼 만한 직업이죠.”
Posted by hur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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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13 1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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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질테다...내 마음대로...
hur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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