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제피자주식회사 성신제 고문

태극기 앞세운 열정파 엘리트
"순국산 피자로 세계를 잡는다"


52개의 피자헛 매장과 케니 로저스 매장을 운영하다 ‘성신제 피자’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개발한 성신제 고문. ‘현장’과 ‘한국화’를 중시하는 그는 나이 쉰에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음식점과는 전혀 상관없던 정치학도가 순국산 피자 브랜드 성신제 피자를 내기까지의 과정은 배짱과 외식산업 토착화라는 사명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산을 타다가 인명사고가 날 때는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올 때죠. 산 정상에서 굴러 떨어져 일어나 보니 주위는 어둑하고, 산은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고…. 부도를 맞았던 당시 제 기분이 그랬어요.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발이 삐끗해 굴러 떨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인생의 황혼기인 쉰 살이더군요.”
보성중학교 수석 졸업,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해군사관학교 국제법 교관. 성신제피자주식회사의 성신제 고문이 걸어온 길은 누가 봐도 정통 엘리트 코스다. 게다가 10여 년 동안 피자헛 매장 50여 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현재는 국내 고유 브랜드 성신제 피자의 고문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의 자신을 ‘산에서 굴러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다시 산을 오르는 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패를 모르면 성공도 없다.


엘리트 정치학도, 냉대와 멸시 뚫고 배짱 하나로 피자와 첫 인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 초콜릿을 얻어먹기 위해 몰몬교도들을 따라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그는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는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의 느낌은 ‘척박하다’였어요. 성공에 조급증을 내는 사람들로 가득했거든요. 우리 나라는 2등도 필요없잖아요.”
호남정유(주) 비서실과 (주)삼화의 서울 무역센터를 거쳐 79년에 스테인리스 주방용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오퍼상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음식점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가 피자헛을 한국에 들여오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주방용품 오퍼상을 운영하던 81년 펩시코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인 ‘피자헛’에 주방용품을 수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전 세계적으로 피자헛 매장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매장들에 주방용품을 수출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포크 하나, 나이프 하나 만드는 데에도 정열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며칠 밤낮을 고군분투해 만들어낸 샘플을 들고 미국 피자헛 본사로 향했다. 가장 좋은 제품이라는 자신감과 계약이 잘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어떻게 설득을 할까, 무슨 음식을 접대할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사업구상으로 가득 차있었지만 그를 맞이한 건 냉대와 멸시였다. 매니저도 아닌 말단 담당직원이 그를 맞이했고, 그의 모든 노력이 담긴 포크와 나이프를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상담은 단 몇 분 만에 끝났다. 수출 계약은 성사되었지만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오기를 갖게 했다. 그는 “내가 피자헛 매장을 가지고 있다면 주방용품 오더는 전부 내게 떨어지겠지”라는 엉뚱한 욕심을 품는다.
1984년 피자헛은 한국 시장 진출을 한참 준비하고 있었다. 직원 4명을 둔 오퍼상 외에는 가진 게 없었지만 그는 무작정 펩시코 본사를 찾았다. 본사 입장에서는 ‘성신제’라는 인물의 배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재벌들이 대형 외식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이 현상은 2001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본사를 찾은 그가 다짜고짜 던진 말은 “공정한 기회만 주십시오”였다. 그렇게 그는 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사실 그때 펩시코 사장에게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당신들 장사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팔을 걷어붙이고 내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겠다, 매장을 매일 둘러보겠다…. 재벌 사장들이 할 수 없는 걸 해주겠다고 담판을 지었지요.”
이러한 그의 거짓말(?)은 먹혀들어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웃기는 젊은이’ 성신제를 통해서 피자헛이 한국 땅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펩시코의 피자헛은 1985년 이태원에 첫 매장을 열었다. 86년 아시안게임으로 눈길을 끌면서 브랜드가 알려지고, 열악한 국내 피자에 비해 ‘먹을 만한 피자’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슈가 되었던 건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엘리트가 식당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정한 외식 프랜차이즈의 본부로 발돋움

대형 외식 레스토랑을 가지고 싶은 것보다 주방용품을 많이 팔고 싶었던 그는 음식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그렇지 못할 상황이라면 하는 일을 어떻게 좋아할까를 고민해야죠. 그렇게 고민하다보니 외식사업의 매력을 하나하나 찾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1993년엔 52개 피자헛 가맹점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피자헛이 한국에서 호황을 이루자 미국 본사와 분쟁이 일기 시작했다. 그에겐 더 이상 그를 방어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를 아들처럼 귀여워해 주던 경영진들이 은퇴해 일선에서 물러나 앉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해 성신제는 52개 피자헛 가맹점을 전부 팔고 ‘케니로저스 로터스 치킨’을 운영한다. 하지만 그렇게 문을 열어 잘되는가 싶던 치킨 사업은 1997년 IMF를 맞이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프랜차이즈 본부와 가맹점의 싸움은 칼자루와 칼날을 쥐고 하는 싸움과 같아요. 그때 전 칼날을 쥐고 있으면서 칼자루를 쥔 본부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죠. ‘성신제’라는 이름을 건 피자 브랜드를 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칼자루를 쥐고 싶었던 거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동화 브랜드 ‘미즈노’와 ‘아식스’는 지난 64년 도쿄 올림픽이 있기 전까지 일본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상표였다. 그들은 이 행사를 계기로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띄웠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미국 영세업체였던 ‘나이키’ 운동화를 만들어 세계로 수출하면서도 미국 본사에 세계시장 영업권은 물론 국내 영업권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전 가맹점의 서러움을 알아요. 제 이름을 건 브랜드의 본부 입장에서 현재의 가장 큰 숙제는 가맹점과의 관계에 신뢰를 쌓는 겁니다. 외국에선 송사 중 제일 많은 분야가 프랜차이즈예요. 본부와 가맹점 사이의 싸움이 매우 치열하죠. 그만큼 둘 사이에 신뢰를 쌓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면 못할 것도 없는데….”
그는 요즘 성신제 피자 정도면 좀더 많은 가맹점을 낼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성신제 피자는 압구정, 명동, 부산 그리고 백화점에 4개 등 총 9개의 매장이 있고, 그중 가맹점은 압구정점과 부산점뿐이다.
“저는 본부와 가맹점의 경험을 다 가지고 있어요. 성신제 피자 매장을 내겠다는 사람들은 많지만 안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내줄 수는 없잖아요. 물론 이런 제게 ‘웃긴다’거나 ‘까다롭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그가 가맹점주를 뽑는 기준은 ‘몸과 마음을 바쳐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사업 가운데 특히 외식업은 ‘현장’이 가장 중요해요. 점주가 현장에서 온 정렬을 쏟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비교해보면 종업원의 태도나 매장 청결 등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서류로 잔반 통계치를 받지만 샐러드바의 어떤 종류가 제일 많이 남았는지, 피자의 어느 부분을 남기는지, 고객이 정말 맛있게 먹는지는 현장이 아니면 느낄 수 없거든요. 매뉴얼이 표준화되어 있다는 맥도날드도 점장의 운영 방식에 따라 분명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잖아요.”


외국에서의 경쟁 무기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

그는 아침이면 늘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출근을 한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점심 장사가 안 됐다면 저녁엔 잘될 거야. 자 좀더 깨끗하게 치워두자”라며 종업원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그의 적은 ‘섣부른 패배주의’다.
처음 피자헛에 주방용품을 수출하기 위해 내뱉었던 거짓말은 참말이 되었다. 그는 매일 명동과 압구정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직접 주문을 받거나 서빙을 하거나 카푸치노를 만든다.
성신제 피자의 특징은 녹차 반죽과 김치 피자. 그는 지극히 한국적인 피자 개발로 피자독립의 선봉에 서있다. 그는 국내에서 외국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외국생활을 해본 적이 단 하루도 없다.
“외국 출장은 많이 가요. 피자기술에도 트렌드가 있거든요. 세계시장을 돌면서 반죽이나 토핑, 굽기 등의 기술을 수시로 업데이트 시켜야 해요. 성신제 피자의 목적은 순수 국산 브랜드로 세계 피자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거든요.”
성신제 피자가 ‘순수한 국산’피자 브랜드라는 점에서 그의 자부심은 크다. 요즘 그가 준비하는 건 2002년 싱가포르에 성신제 피자 가맹점을 내는 것. 이는 성신제 피자의 레시피와 콘셉트로 시도하는 첫 해외 진출이다.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곧 성신제 피자의 태극기와 그의 사진을 외국에서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의 외식산업은 해외 브랜드에 의해 주도되었어요. 이제 외식산업의 토착화 붐을 이루는 게 중요해요. 이 토착화는 바로 세계화의 발판이 되어 줄 겁니다. 성신제의 녹차피자를 외국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아세요?”
‘전통적인 것인 곧 세계로 통한다’라는 말은 아마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은퇴 후, 아내와 배낭을 매고 시골이나 지방의 작은 음식점을 컨설팅해주는 것. 아직은 10년 뒤에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란다.
“컨설팅 비용은 맛있는 한 끼 식사면 돼요. 외식산업의 부흥은 작은 곳에서 나옵니다. 시골길이나 고속도로변의 작은 음식점이 알려지고, 유명해지면 외국 브랜드에 빼앗긴 한국 외식시장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외식산업 한국화를 위한 독립운동은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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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ur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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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스타벅스커피 코리아 정진구 대표이사

진한 커피 향내에 묻어나는 ‘깊고 아름다운 인생’

스타벅스 사상 최단시간 흑자 달성과 모범적인 점포 운영으로 미국 본사에서 대상(president award)을 수상한 정진구 사장. 그의 인생은 체인스토어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세븐일레븐’에서 ‘배스킨라빈스’, 다시 ‘파파이스’와 ‘스타벅스’로 이어지는 시간들은 그가 몸담았던 기업들의 기록을 깨는 과정이기도 했다.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짙은 향내 속에 묻어나는 이 노신사의 인생 철학은 ‘기업 리더’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새벽 6시 20분, 경기도 분당에 있는 집을 나선 한 노신사는 스타벅스에 들러 8온스짜리 드립 커피 한 잔을 산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종업원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매장을 둘러보기도 하는 그 노신사는 에스프레소 커피 전문점 하면 떠오르는 ‘스타벅스’를 한국에 들여온 주인공이다. (주)스타벅스커피 코리아의 정진구 사장(56)은 항상 그 시간이면 서울 어딘가의 스타벅스 매장을 둘러본다. “우리 아들, 딸들 얼굴을 봐야 하루가 시작되죠. 여의도처럼 매장이 두 개 있는 곳엔 꼭 두 곳 다 들러야 해요. 서운해하거든요. 최고경영자가 매장을 찾는다면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고, 부담이 될텐데…. 우리 파트너들 참 착하죠?” 자녀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정 사장에게 매장 직원들은 아들, 딸이고 사업 파트너다. 손님이 많아 매장이 바쁘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설거지며 커피 만드는 일을 돕기도 하는 품새가 꽤나 익숙해 보인다.

도미 유학생, 세븐일레븐의 명물이 되다

“스타벅스는 사장도 돈 내고 커피 사먹어야 돼요”라며 소박하게 웃는 그가 체인 사업에 발을 디딘 것은 1974년 미국 유학 시절이다. 그 무렵 한국은 보릿고개로 서민들이 먹고살기도 힘들었는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왜 미국은 잘 먹고 잘 살까?’라는 의문으로 꽉 차 있었다. 농사꾼이 꿈이었던 그가 미국행을 결심한 것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잘 사는지를 보고 와서 식량난을 해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제게 한국의 식량난을 해결한다는 건 사명감과도 같았어요.”
원대한 꿈과 사명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정작 그를 기다린 것은 오일 쇼크로 인한 불경기였다. 공부는 물론, 취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한 상황에서 신문 한쪽 귀퉁이에 실린 건설회사의 ‘공정관리 직원’ 채용 공고는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일 단위 생산성 계산 직원 채용에서 그는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이 건설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현지인들과는 달리 계산기도 없이 치른 수학 시험에서 만점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입사한 회사는 몇 년 후 부도를 맞았고, 그는 세븐일레븐 점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무덤(grave night shift)이라고까지 불리는 밤 시간대(밤 11시∼아침 7시)에 일을 하면서 그는 편의점 사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의 구멍가게 문화에 익숙했던 그에게 미국의 편의점 문화는 충격이었다. 편의점 유통구조가 궁금해졌고, 정식으로 세븐일레븐에 입사를 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운’이 따라 줘 진급도 빨랐고, 점포 운영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런 그에게 세븐일레븐에서 메릴랜드 주의 고속도로 변에 위치한 5000평 규모의 점포를 운영해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주택가나 상가, 비즈니스 빌딩가에만 들어섰던 세븐일레븐이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이 대형 직영점에서 기대만큼의 매출을 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무선통신 라디오로 밤샘 방송을 했다. “지금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 버튼을 눌렀다. 50초 후에 오면 가장 신선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30분 전에 핫도그를 그릴에 넣었는데 지금 오면 딱 먹기 좋게 익었다” 등의 방송 멘트는 확실한 효과를 발휘했다. 18개의 바퀴가 달린 트럭을 모는 운전수들은 이 방송을 듣고 속속 허허벌판에 마련된 편의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외로움과 싸우며 밤새 트럭을 모는 운전수에게 다정다감한 서비스를 하기 위해 여직원을 고용하고 그들과 함께 뜬눈으로 매장을 지켰다. 그의 열성 때문이었을까. 메릴랜드 주의 세븐일레븐 매장은 그가 운영한 지 6개월 만에 한 달 평균 2만5000잔 이상의 커피를 팔아치웠다. 덩치만 크고 실속은 없었던 이 점포는, 미국 전체 세븐일레븐은 물론 커피를 파는 모든 매장 가운데 가장 많은 커피를 파는 기록을 세웠다. 커피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그는 슈퍼바이저로서 점포의 효율적 경영에 대해 고민하고, 본사에 무수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세븐일레븐에서 만 9년을 근무하면서 그가 만들어낸 점포 운영 매뉴얼만도 강도 예방법(robber prevention program)을 포함해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세븐일레븐은 회사 운영 매뉴얼 강화를 위해 매년 7000여 개 점포의 매니저들을 대상으로 회사 운영 아이디어 콘테스트를 열고 있다. 이 중 우수 아이디어를 뽑아 본사 회장 부부와 함께 라스베이거스며 휴양지로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만 9년을 세븐일레븐에 근무했던 그가 그 여행에 동반한 횟수는 8번. 세븐일레븐의 ‘명물’로 신화를 창조한 것이다.


새로운 것을 전파하는 데 효과적인 ‘보여주기 마케팅’

1986년, 그는 12년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3년간 체류할 계획으로 갔던 미국 땅에서 9년이나 늦게 귀향한 것이다. 그는 하드와 아이스케키가 빙과류의 전부였던 한국에 아이스크림을 전파할 계획이었다. ‘배스킨라빈스’가 한국 진출을 시작하면서 그를 찾았고, 그해 8월에 명동 1호점을 오픈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어른도 아이스크림을 길거리에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인식시키는 일이었다. 음식은 꼭 앉아서 먹어야 한다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그에겐 힘겨운 싸움 상대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것.
"직원들에게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길거리를 활보하게 했어요. 저도 예외는 아니었죠. 소비자들에게 아이스크림도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다고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그의 보여주기 마케팅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1988년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러한 직접 보여주기 마케팅은 그가 새로운 것을 전파하기 위해 꼭 거치는 과정이다. 스타벅스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당연하다.
"길거리에 다니시면서 제 손에 스타벅스 컵이 없는 사진을 찍어 오세요. 누구든 원하는 시간, 원하는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손엔 어김없이 8온스짜리 스타벅스 컵이 들려있다. “저처럼 나이든 사람도 들고 다니면서 먹고 마시는데 젊은 사람들이 못할 게 뭐 있겠어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이 대중화될 즈음, AFC 파파이스 본사에서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시아 태평양 전체 시장에 ‘파파이스’ 매장 여는 것을 주관해달라는 것이었다. 1994년, 그는 AFC 파파이스 미국 본사의 아시아 본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타벅스라는 커피 브랜드를 만나고 나서 그는 고액 연봉과 세계적인 기업의 임원이라는 탄탄한 자리를 과감하게 떨쳤다.
위암 초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던 1998년, 그는 애틀랜타 상공에 떠있는 비행기 안에서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라는 책을 읽었다. 슐츠의 경영이념과 인생철학은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얼마 후, 한국에 들른 그는 스타벅스의 ‘러브콜’을 받았다. 한국에서 스타벅스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를 진두지휘할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성패를 가늠할 수 없는 불안감을 감수하며 한국 사람들한테는 낯설기만한 에스프레소 커피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쉰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더불어 사는 삶, 나눔의 미학이 만들어낸 향기

한국의 커피 역사는 100년을 넘어선다고 한다. 정 사장이 스타벅스를 한국에 들여오던 당시, 한국에는 꽤나 많은 커피 전문점들이 있었지만 가격이나 맛에서 고객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고급 커피라고 해봐야 카푸치노나 에스프레소, 카페라테 등이었고 그마저도 가격이 비싼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객에게 다양한 종류의 고급 커피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하는 스타벅스의 출현은 커피 마니아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1999년 7월 문을 연 스타벅스 이대점은 6개월 동안 교육장으로만 이용되었다. 장사 이전에 그가 가장 중요하게 고집하는 건 ‘교육’이다. “사업에서 장기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투자가 교육이에요. 그때 6개월 동안 하드 트레이닝을 한 파트너들은 현재 매장의 점장들이죠. 커피를 만들거나 점포를 운영하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점장을 선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건 ‘품성’입니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을 뽑아놔야 매장에서 일하는 파트너들이나 매장을 찾는 손님들이 편하죠.”
정 사장을 비롯해 스타벅스 직원들은 아침 8시 30분이면 트레이닝실로 모여든다. 그날 당번이 만든 커피를 마시고, 그의 설명과 콘셉트를 듣고, 맛을 평가한다. 새로운 메뉴 개발과 맛좋은 커피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지금까지 하루도 거른 날이 없다. 신입사원들도 시간당 급여를 올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4주 교육 프로그램 과정을 마치게 한다.
그의 경영이념은 한결같이 ‘더불어 살자’다. ‘파트너’라고 호칭하는 직원들, 파트타이머들까지 이익 배당과 스톡옵션을 챙겨주고, 회사의 이익 중 일정 부분을 떼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아동병원에서 주관하는 불우아동 치료연구 개발비를 모금하는 모임에 정기적인 지원을 계획중이기도 하고, 회사 차원으로 보육원을 정해 두고 이익의 일부를 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 사장이 자랑스러워하는 건 파트너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어려운 이웃들을 돌볼 때다.
올해 초, 그를 감동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미국 본사에서 스타벅스 사상 최단시간 흑자 달성과 모범적인 점포 운영으로 대상(president award)을 수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를 감동시켰던 것은 수상 자체가 아니었다. 상금 600만원을 파트너들에게 맡겼는데, 그 돈이 고아원의 컴퓨터실과 도서관 설립에 전액 기부된 사실이었다. “얼마나 대견스럽던지…. 이러니 제가 우리 파트너들을 안 믿을 수가 있겠어요? 제가 할 일은 우리 파트너들을 행복하게 하는 거예요. 그들을 행복하게 하면 매장을 찾는 고객들도 행복해질 수 있거든요. 오너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죠.”
그는 4000만원을 들여 연세대학원에 파트너들의 의견 수렴작업을 의뢰했다. 회사 자체 내에서 조사를 하면 진솔한 의견을 들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그는 설레기까지 한다고.
'더불어 함께 하기.’ 미국의 세븐일레븐에서 10년을 근무하면서, 그리고 배스킨라빈스와 파파이스, 스타벅스를 운영하면서 그가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기업이념이다. 정 사장은 가맹본부가 주체가 되어버린 우리 나라 프랜차이즈 사업 구조를 안타까워한다. 본부와 점주는 공동체,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하는 성공 파트너들이다. 미국에서는 운영 아이디어들이 가맹점주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아이디어들을 본부에서 축적해 성공 비즈니스의 틀을 만든다.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회사 만드는 게 목표

“무슨 사업이든 성공하기 위한 원칙은 ‘고객 만족’입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1차 고객은 가맹점주죠. 본부가 가맹점을 보살피면 가맹점은 자연스럽게 제2의 고객을 보살피게 되거든요.” 스타벅스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정진구 사장. 그는 금년 말까지를 테스트 마켓 기간, 향후 3년을 제2의 도약기로 정하고 적극적인 점포 개발을 해나갈 계획이다. 그 첫 걸음으로 지난 5월부터 부산에 4개점, 부평과 광주광역시, 일산 화정 등 지방 시장 개척에 나섰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 8개월간을 고생했지만 그는 지금도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오르고 바삐 뛰어 다닌다. “제 목표는 스타벅스가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지 만 5년이 되는 2004년까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회사가 되는 겁니다. 고객에게 세계 최고 품질의 커피를 제공한다는 의지와 자부심만 있으면 못할 게 없어요.”
약간의 설탕을 넣은 드립 커피를 하루에도 5잔 이상 마신다는 그에게선 에스프레소처럼 진하고 깊은 인생의 맛이 느껴진다.



[ 스타벅스커피 코리아 정진구 대표이사 성공 스토리 ] 다운로드


mur mur...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약간은 고집스럽고, 약간은 유한...하지만...일에는 날카로운...
뭔가 굉장히 여러 가지 느낌들이 얽혀들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답니다
스타벅스의 대외 홍보위원이라고 놀림을 당할 정도로...
스타벅스 마니아인 본인으로서는...평생 이뤄야할 몇 가지 소원 중의...하나를 이뤘죠...
갱장한 분이시더군여...세븐일레븐부터 배스킨라빈스, 파파이스, 스타벅스를.. 한국에 들여오신 분이라는 데...
굉장한 드라마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일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넘쳐나서... 계단을 두 개씩 뛰어오르고...무쟈게 바쁘게 다니시더군요
그분의 표현대로라면...나이 생각 못하고....자신이 젊은 줄 알다가...다쳤죠 뭐...이러는 데....
다리를 다쳐 8개월간을 목발을 짚고 다녔다는데도...여전히 급하게 다니시더군요
새벽 6시 20분이면 집을 나서 스타벅스 드립 커피를 사들고 매장을 돌아본다는데...
앞치마를 두른 모습이나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꽤나 익숙해 보이더이다...
인사동 '스타벅스 커피'에 대한 얘기도 했었는데...
자금성 안에 있는 스타벅스도 간판이 영문으로 들어가있다네요...
그만큼 간판과 로고에 대한 고집이 대단한 스타벅스가... 그 로고를 포기한 거죠...
처음 한글로 쓰인 스타벅스 커피를 봤을 때는... "사기 아냐"라면서 웃어넘겼는데....
그리고 한국 전통 창살무늬와 실내 인테리어가
미국 본사와 한국을 여섯번이나 왔다리 갔다리 한 거라네요...
인테리어는 본사에서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도면을 보내오면...다시 보내고... 다시 도면 보내오면 다시 수정하고...
마음에 안들어서 다시 고치고...또 고치고...
스타벅스 사상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데...나름대로 자랑스럽다는 기분까지 들더군여...
인사동에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걸 생각해보면...그리 나쁘다는 생각은 안들던데...
여하간에...아주 산뜻하고 뜻깊은 만남이었고...
마지막에 받은 스타벅스 선물 세트와 커피 쿠퐁 때문에 더 기분 좋아져 돌아왔답니다 ^^
Posted by hur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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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질테다...내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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