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판으로 그리는 80년 인생 회고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명예교수 원의범


'최첨단'과 '최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려한 전시장의 조명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프로그램들, 그들을 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지난 10월 25일 한글 윈도우 XP 출시 행사장의 풍경이었다. 최첨단과 화려함이라는 코드로 얼룩진 전시장 한켠에 그곳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80세 노교수의 모습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원의범 명예교수. 80 인생을 그림판에 담아내는 작업을 마친 그를 만났다.



컴퓨터의 달인이라 알려진 열 살 난 아들을 둔 서른 중반의 아줌마도 '부팅'이 뭔지 모른다는데 여든 살의 할아버지가 윈도우 그림판만으로 그림을 그린단다. 설마. 몇 개의 작품을 보니 보통 솜씨는 아닌 듯 싶은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디라고?"
되묻고 대답하기를 수 차례, '아하!PC'라는 걸 이해시키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만난 원의범 교수는 전화 통화로 느꼈던 것보다 훨씬 정정했다. 정년퇴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세대와 동국대 대학원 강의를 통해 일주일에 3일은 여전히 학생들과 만난다. 부처를 그리겠다고 수십 장의 불상사진을 복사해대기도 하고, 호랑이를 그리고 싶어 수 차례 에버랜드를 찾기도 했다. 불교 금언들을 모은 '알게 모르고 모르게 알고'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오는 제자들의 전화까지. 여든 살의 그는 '정정하다'라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삶과 일에 열정적이었다.


삶의 흔적을 한 데 모은 84장의 그림

원의범 교수가 컴퓨터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막내딸이 아들의 컴퓨터를 바꾼다고 쓰던 것을 가져다주면서였다. 타이프로 강의안을 작성하던 그에게 컴퓨터 자판을 손에 익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컴퓨터 선생은 중학교를 다니는 외손자와 사위. 컴퓨터를 이용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바로 전화를 건다. 연필이든, 크레용이든 손에 잡기만 하면 그림을 그리던 어린시절부터 먹과 붓으로 그림을 그리던 그 당시까지, 엄청나게 그림을 그려대던 그를 봐왔던 손자와 사위들이 그림판창을 열어주었다. 80을 바라보는 나이, 컴퓨터를 대하는 게 겁났을 만도 한데 원의범 교수는 그림판을 두고 '해볼수록 재미있는 도구'란다.
"그림판을 처음 대했을 때의 느낌이란…. 80년 동안 머릿속에서만 그려지던 그림들을 그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동경대로 유학까지 가려다가 좌절된 꿈,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슴 한켠에 접어두었던 미술의 꿈을 그림판에 펼치기 시작했다. 윈도우의 그림판을 알게 되면서 지난 3년은 내리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했다. 일제시대에 있었던 초등학교 운동회와 6.25 전쟁 이후 반동으로 몰려 스물 일곱의 나이로 탈북을 하던 아찔한 순간, 부산에 피난가 중학교 영어선생을 하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즐겼던 첫 데이트, 108 번뇌와 오대산 월정사의 풍경…. 그가 살아온 80년 세월의 흔적인 인생과 종교, 철학을 전부 담아 한 데 모으는 작업이었다.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은 채 밤새 그림 그리는 데만 열중했다. 건강을 해칠까 염려한 아내와 자식들의 만류에도 그의 고집은 꺽이지 않았고, 그렇게 작업된 84장의 그림 중 어느 하나 그의 삶과 철학에 소홀한 것이 없다.
"그림판의 매력이 뭔 줄 아세요? 완성이 없다는 겁니다. 그림판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는 스케치를 주로 했었는데, 틀리면 고칠 수도 없고 다시 그리려면 먹이든, 물감이든 다시 준비해야하고, 번잡스럽기만 했어요. 그런데 그림판은 안 그래요. 선이고, 각이고 맘에 들 때까지 쉽게 얼마든지 고칠 수 있거든요. 마무리한 그림이라도 내 생각이 바뀌었을 때 다르게 고쳐 표현할 수 있죠."
그림판으로 제일 처음 그렸다는 '가을운동회'는 만국기며 논과 밭, 하늘 등의 자연과 박 터뜨리기 경기를 하는 학생들, 의자에 앉아 심판을 보고 있는 선생님 등 사람들의 모습이 세심하게도 표현되어 있다.
"그림판으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인내와 정열이 필요해요. 각도를 맞추고 곡선과 점으로 모든 사물과 생물들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정말 하고싶다는 열정이 없다면 할 수 없죠."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림판에서는 선 하나 긋기도 쉽지 않다. 마우스만으로 모든 느낌을 살리기란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귀띔한다.
"그림판에서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비결이 뭔지 아세요? 지우개를 잘 써야해요. 물결을 그려놓고 지우개를 잘 쓰면 정말 그럴 듯하죠."
테크닉과 아트는 일맥상통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림판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림을 보여주겠다는 제안을 한 그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서자 둘째 딸이 고등학교 시절 놓은 수로 만들었다는 병풍이 쳐있고, 그가 그린 그림의 액자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책상 한켠에는 삼성 매직스테이션 M5315 컴퓨터와 HP 930C 프린터가 자리잡고 있다. 그림판을 알게 되면서 새로 산 것들이다. 이들을 가지고 한번에 그린 그림도 있고, 밤낮 없이 일주일을 꼬박 허비한 그림도 있다. 그리고 책상 아래의 공간에는 A4 용지와 컬러 잉크들이 꽉 들어차 있다. 컴퓨터를 부팅하자마자 시작 버튼을 누르고 그림판을 불러낸다. 그런 뒤에 이어지는 어설픈 손놀림. 그림판을 열고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림을 불러오거나 저장하는 법은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하지만 불러온 그림들이 화면에 뜨자 아까와는 다르게 손놀림이 익숙해진다. HP 프린터의 트레이가 용지를 고정시키는 데 까다롭다는 것도 간파하고 있었다. 놀라움에 그의 동작들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한마디 던진다.
"난 다른 건 하나도 몰라."
플로피디스켓에 그림을 저장하는 법도, 그 흔한 E-메일 보내는 법도 모른다. 그가 컴퓨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림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프린트하는 방법뿐이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의 그림이 어렴풋이나마 공개된 건 지난 10월 25일, 한글 윈도우XP 출시 기념 행사장에서였다.
"그림을 그려놓고 보니 혼자 보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앨범을 제작해 MS사에 들어갔죠."
그의 그림을 보고 MS 관계자들이 보인 반응은 꽤나 재밌다. "그림 좋네요" 3분의 1쯤 넘어가자 "글도 좋네요" 반쯤 넘어가자 "연륜이 계시군요" 그의 앨범을 다 보고 나서 던진 그들의 마지막 말은 "참 다양하군요"였다. 그 결과 20점을 뽑아 10장은 한글 윈도우XP 출시 기념 행사장에 확대 전시되었고, 나머지는 슬라이드 필름으로 상영되었다.


그림은 인생을 마무리 짓는 작업

"아쉬운 건 모니터로 보여지는 색과 프린트를 했을 때의 색이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마음에 드는 하늘색을 제대로 표현해줄 수 있는 프린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3년 동안 83장의 그림을 완성시킴으로써 그는 평생의 가장 큰 소원을 풀었다. 문득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길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파란 바탕에 노란 선이 엉켜있고, 분홍 선이 따로 떨어져있는 여든 네 번째 그림.
"아마도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마지막 그림이 될 겁니다. 이젠 그리고 싶지 않아요. 80인생의 삶과 철학, 내 모든 걸 84장의 그림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릴 게 없거든요."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특별히 증정한다는 그림을 프린트해 친필 사인과 처음 써본다는 낙관까지 찍어주는 그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다.

Posted by hur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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