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제피자주식회사 성신제 고문

태극기 앞세운 열정파 엘리트
"순국산 피자로 세계를 잡는다"


52개의 피자헛 매장과 케니 로저스 매장을 운영하다 ‘성신제 피자’라는 독자적인 브랜드를 개발한 성신제 고문. ‘현장’과 ‘한국화’를 중시하는 그는 나이 쉰에 새로운 브랜드를 개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음식점과는 전혀 상관없던 정치학도가 순국산 피자 브랜드 성신제 피자를 내기까지의 과정은 배짱과 외식산업 토착화라는 사명감으로 점철되어 있다.



"산을 타다가 인명사고가 날 때는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올 때죠. 산 정상에서 굴러 떨어져 일어나 보니 주위는 어둑하고, 산은 까마득히 높아만 보이고…. 부도를 맞았던 당시 제 기분이 그랬어요.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리다가 발이 삐끗해 굴러 떨어져 정신을 차려보니 인생의 황혼기인 쉰 살이더군요.”
보성중학교 수석 졸업,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해군사관학교 국제법 교관. 성신제피자주식회사의 성신제 고문이 걸어온 길은 누가 봐도 정통 엘리트 코스다. 게다가 10여 년 동안 피자헛 매장 50여 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현재는 국내 고유 브랜드 성신제 피자의 고문이기도 하다. 그는 현재의 자신을 ‘산에서 굴러 떨어져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다시 산을 오르는 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실패를 모르면 성공도 없다.


엘리트 정치학도, 냉대와 멸시 뚫고 배짱 하나로 피자와 첫 인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너무 배가 고파 초콜릿을 얻어먹기 위해 몰몬교도들을 따라다닐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그는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는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의 느낌은 ‘척박하다’였어요. 성공에 조급증을 내는 사람들로 가득했거든요. 우리 나라는 2등도 필요없잖아요.”
호남정유(주) 비서실과 (주)삼화의 서울 무역센터를 거쳐 79년에 스테인리스 주방용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오퍼상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음식점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그가 피자헛을 한국에 들여오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주방용품 오퍼상을 운영하던 81년 펩시코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인 ‘피자헛’에 주방용품을 수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전 세계적으로 피자헛 매장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매장들에 주방용품을 수출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포크 하나, 나이프 하나 만드는 데에도 정열과 노력을 쏟아 부었다. 며칠 밤낮을 고군분투해 만들어낸 샘플을 들고 미국 피자헛 본사로 향했다. 가장 좋은 제품이라는 자신감과 계약이 잘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다. 어떻게 설득을 할까, 무슨 음식을 접대할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사업구상으로 가득 차있었지만 그를 맞이한 건 냉대와 멸시였다. 매니저도 아닌 말단 담당직원이 그를 맞이했고, 그의 모든 노력이 담긴 포크와 나이프를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상담은 단 몇 분 만에 끝났다. 수출 계약은 성사되었지만 그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오기를 갖게 했다. 그는 “내가 피자헛 매장을 가지고 있다면 주방용품 오더는 전부 내게 떨어지겠지”라는 엉뚱한 욕심을 품는다.
1984년 피자헛은 한국 시장 진출을 한참 준비하고 있었다. 직원 4명을 둔 오퍼상 외에는 가진 게 없었지만 그는 무작정 펩시코 본사를 찾았다. 본사 입장에서는 ‘성신제’라는 인물의 배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재벌들이 대형 외식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이 현상은 2001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본사를 찾은 그가 다짜고짜 던진 말은 “공정한 기회만 주십시오”였다. 그렇게 그는 사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담판을 지을 수 있었다.
“사실 그때 펩시코 사장에게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당신들 장사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팔을 걷어붙이고 내가 직접 주방에 들어가겠다, 매장을 매일 둘러보겠다…. 재벌 사장들이 할 수 없는 걸 해주겠다고 담판을 지었지요.”
이러한 그의 거짓말(?)은 먹혀들어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웃기는 젊은이’ 성신제를 통해서 피자헛이 한국 땅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펩시코의 피자헛은 1985년 이태원에 첫 매장을 열었다. 86년 아시안게임으로 눈길을 끌면서 브랜드가 알려지고, 열악한 국내 피자에 비해 ‘먹을 만한 피자’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슈가 되었던 건 경기고,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엘리트가 식당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정한 외식 프랜차이즈의 본부로 발돋움

대형 외식 레스토랑을 가지고 싶은 것보다 주방용품을 많이 팔고 싶었던 그는 음식사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죠. 하지만 그렇지 못할 상황이라면 하는 일을 어떻게 좋아할까를 고민해야죠. 그렇게 고민하다보니 외식사업의 매력을 하나하나 찾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1993년엔 52개 피자헛 가맹점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피자헛이 한국에서 호황을 이루자 미국 본사와 분쟁이 일기 시작했다. 그에겐 더 이상 그를 방어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를 아들처럼 귀여워해 주던 경영진들이 은퇴해 일선에서 물러나 앉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해 성신제는 52개 피자헛 가맹점을 전부 팔고 ‘케니로저스 로터스 치킨’을 운영한다. 하지만 그렇게 문을 열어 잘되는가 싶던 치킨 사업은 1997년 IMF를 맞이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프랜차이즈 본부와 가맹점의 싸움은 칼자루와 칼날을 쥐고 하는 싸움과 같아요. 그때 전 칼날을 쥐고 있으면서 칼자루를 쥔 본부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죠. ‘성신제’라는 이름을 건 피자 브랜드를 내놓은 것도 그 때문이에요. 칼자루를 쥐고 싶었던 거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운동화 브랜드 ‘미즈노’와 ‘아식스’는 지난 64년 도쿄 올림픽이 있기 전까지 일본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상표였다. 그들은 이 행사를 계기로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띄웠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미국 영세업체였던 ‘나이키’ 운동화를 만들어 세계로 수출하면서도 미국 본사에 세계시장 영업권은 물론 국내 영업권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전 가맹점의 서러움을 알아요. 제 이름을 건 브랜드의 본부 입장에서 현재의 가장 큰 숙제는 가맹점과의 관계에 신뢰를 쌓는 겁니다. 외국에선 송사 중 제일 많은 분야가 프랜차이즈예요. 본부와 가맹점 사이의 싸움이 매우 치열하죠. 그만큼 둘 사이에 신뢰를 쌓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면 못할 것도 없는데….”
그는 요즘 성신제 피자 정도면 좀더 많은 가맹점을 낼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성신제 피자는 압구정, 명동, 부산 그리고 백화점에 4개 등 총 9개의 매장이 있고, 그중 가맹점은 압구정점과 부산점뿐이다.
“저는 본부와 가맹점의 경험을 다 가지고 있어요. 성신제 피자 매장을 내겠다는 사람들은 많지만 안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내줄 수는 없잖아요. 물론 이런 제게 ‘웃긴다’거나 ‘까다롭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그가 가맹점주를 뽑는 기준은 ‘몸과 마음을 바쳐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사업 가운데 특히 외식업은 ‘현장’이 가장 중요해요. 점주가 현장에서 온 정렬을 쏟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비교해보면 종업원의 태도나 매장 청결 등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서류로 잔반 통계치를 받지만 샐러드바의 어떤 종류가 제일 많이 남았는지, 피자의 어느 부분을 남기는지, 고객이 정말 맛있게 먹는지는 현장이 아니면 느낄 수 없거든요. 매뉴얼이 표준화되어 있다는 맥도날드도 점장의 운영 방식에 따라 분명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잖아요.”


외국에서의 경쟁 무기는 지극히 ‘한국적인’ 것

그는 아침이면 늘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출근을 한다. “오늘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점심 장사가 안 됐다면 저녁엔 잘될 거야. 자 좀더 깨끗하게 치워두자”라며 종업원들의 사기를 북돋운다. 그의 적은 ‘섣부른 패배주의’다.
처음 피자헛에 주방용품을 수출하기 위해 내뱉었던 거짓말은 참말이 되었다. 그는 매일 명동과 압구정점에서 시간을 보내며 직접 주문을 받거나 서빙을 하거나 카푸치노를 만든다.
성신제 피자의 특징은 녹차 반죽과 김치 피자. 그는 지극히 한국적인 피자 개발로 피자독립의 선봉에 서있다. 그는 국내에서 외국 브랜드나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외국생활을 해본 적이 단 하루도 없다.
“외국 출장은 많이 가요. 피자기술에도 트렌드가 있거든요. 세계시장을 돌면서 반죽이나 토핑, 굽기 등의 기술을 수시로 업데이트 시켜야 해요. 성신제 피자의 목적은 순수 국산 브랜드로 세계 피자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거든요.”
성신제 피자가 ‘순수한 국산’피자 브랜드라는 점에서 그의 자부심은 크다. 요즘 그가 준비하는 건 2002년 싱가포르에 성신제 피자 가맹점을 내는 것. 이는 성신제 피자의 레시피와 콘셉트로 시도하는 첫 해외 진출이다.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곧 성신제 피자의 태극기와 그의 사진을 외국에서도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의 외식산업은 해외 브랜드에 의해 주도되었어요. 이제 외식산업의 토착화 붐을 이루는 게 중요해요. 이 토착화는 바로 세계화의 발판이 되어 줄 겁니다. 성신제의 녹차피자를 외국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아세요?”
‘전통적인 것인 곧 세계로 통한다’라는 말은 아마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은퇴 후, 아내와 배낭을 매고 시골이나 지방의 작은 음식점을 컨설팅해주는 것. 아직은 10년 뒤에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란다.
“컨설팅 비용은 맛있는 한 끼 식사면 돼요. 외식산업의 부흥은 작은 곳에서 나옵니다. 시골길이나 고속도로변의 작은 음식점이 알려지고, 유명해지면 외국 브랜드에 빼앗긴 한국 외식시장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외식산업 한국화를 위한 독립운동은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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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url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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